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40:1-3)
모두 밝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빛 가운데서만 살게 놔두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어둠의 근원적인 문제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구원)되기까지는 우리는 어둠의 문제와 맞서야 합니다.
인생은 세 가지날 중 하나를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하루는 이 세날 중 하루입니다. 산마루같은 날, 평범한 날, 우울한 날 이렇게 세 날입니다. 산마루같은 날은 산 정상에서 성취를 만끽하는 기분 좋은 날입니다. 살면서 한 두번은 경험합니다. 으시대기도하고 자랑하며 삽니다. 이런 날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평범한 날입니다. 늘 하는 것을 하고 다람쥐 체바퀴 돌듯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둠에 처하게 됩니다. 이 어둠은 사건을 통해 오기도하고, 사건없이 내 내면의 낙심과 우울로 오기도 합니다. 며칠로 끝날 수도 있지만 오래갈 수도 있습니다. 신자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우울한 기독교인” 이란 없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있습니다. 형용모순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정상이지만 실제로 우울은 찾아옵니다. 이런 우울의 어둠이 찾아올 때 우리는 최대한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 엘리아 선지자와 다윗을 보십시오. 엘리야 선지자는 능력이 탁월한 선지자입니다. 갈멜산에서 혼자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 승리합니다. 하지만 승리 후에 이세벨에게 쫓기면서 죽고 싶어합니다. 다윗도 시편에서 틈만나면 불안하다고 고백합니다. 엘리야 선지자와 다윗 모두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이었지만 현실에서 무너집니다. 그들도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싫고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우울해지면 세상 만사를, 나 자신을, 미래를 부정적으로 봅니다.(Aron T.Beck)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므로 다 맘에 들지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 내 앞에 있는 사람, 세상 돌아가는 것 다 맘에 들지 않습니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이 싫어집니다.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므로 내 삶이 이러다 끝 날 거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사건을 통해서든 내 마음의 성향을 통해서든 낙심되고 암담한 어둠의 시간이 오면 이 세 가지(세상과나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가 일어나면서 힘들어지게 됩니다. 마음의 그늘은 숨겨져 있습니다. 자꾸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그늘은 오래 간직하면 좋지 않습니다. 어둠을 빨리 극복하고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 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날 또한 슬플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최정례, 칼과 칸나꽃, 부분)
슬픔도 유통 기간이 있어 점차 희미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과 우울에도 유통기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그런 일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으로 무너지는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울증에 대한 수 많은 약들이 개발되고 있어도 정신과에서 아직 우울증을 해결 못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깊게 봐야 합니다.
다윗도 상당한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2절.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있고’, 12절.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내우외환의 어둠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에서 계속 근심이 솟아납니다. 이때 우울하고 낙심 많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다윗은 해냅니다. 1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에계’하는 반응을 보이면 안됩니다. 1절은 귀한 고백입니다. 다윗의 필사적인 기도입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기다림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기다렸다는 것은 믿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우리 삶에 어둠이 깔릴 때 이 기다림은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윗은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다리는 믿음이 있기에 기도한 것이고, 이 기도로 다윗은 자신의 삶의 현실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저항입니다. 삶의 어려움에 기도로 저항해야 합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 풍파 그치게 하시고, 어두운 밤 환하게 비춰 주십시오’
다윗은 기도로 현실의 어둠을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 굳세게 해 주시는 하나님’ 의지하며 이겨나갔던 것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저항하는 믿음과 기도가 어둠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인생의 세 날들 중 어둠의 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펄벅 여사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펄벅 아시지요?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과 퓰리쳐 상을 받은 분인데 대단한 작가 입니다. 지금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펄벅에게는 정신 지체와 자폐증을 앓고 있는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펄벅이 작가로서 한창 명성을 날릴 때에는 이걸 알고 있었던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환갑이 다돼 갈 무렵에 자기 고백적인 책을 쓰게 됩니다. 그 책 이름이 ‘자라지 않는 아이’(The Child Who Never Grew)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장애로 인해 힘들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고스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펄벅은 자신의 아이가 일생 동안 ‘자라지 않는 아이’로 진단 받았을 때의 절망감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은 모두 사라지고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든다. 죽으면 이 모든 고통은 끝나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주 마음 속으로 차라리 내 아이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울었던가! 정신지체인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인 부모의 이야기가 가끔 신문에 실린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아이가 오늘도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매일 느끼면서 절망은 더욱 깊어 간다. 아이를 돌보기는 힘들고, 아무리 노력해 봐야 아무런 성과도 없다. 몇 살이 되던 간에 정신이 자라지 않는 몸뚱이를 돌보아야 하고, 생기 없고 반응이 없는 흐린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하고, 더듬거리는 손 놀림을 도와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일이 절망감을 더해 주기만 한다’
펄벅은 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달랠 수 있는 슬픔과 달래지지 않는 슬픔이다. 달랠 수 있는 슬픔은 살면서 마음 속에 묻고 있을 수 있는 슬픔이지만, 달랠 수 없는 슬픔은 삶을 바꾸어 놓으며, 슬픔 그 자체가 삶이 된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러면서도 펄벅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떨쳐 버릴 수 없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나면, 거기에서 위안을 찾는 방법도 알 수 있게 된다. 떨쳐 버릴 수 없는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원망하고, 탄식하는 데 힘을 다 쏟아 붓지도 않았다. 가장 큰 변화는 나와 나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 것이다. 삶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수용(acceptance)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배운 것이 정말 많다. 이렇게 슬픈 여정을 거쳐서 나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을 배웠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참지 못하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지능이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진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이는 거짓을 간파 할 줄 알고, 거짓은 절대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 지능이 낮은 아이들은 다른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어 부족한 부분을 벌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모녀의 모든 것을 바쳐 다른 사람이 이런 괴로움을 겪지 않도록 힘쓸 수 있다면 우리의 생애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닐 것이다.’
펄벅은 자신의 힘든 세월을 승화(sublimation)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펄벅은 ‘펄벅 재단’을 설립해서 버림 받은 아이들을 입양시키고 기르는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둠의 때를 극복하는 저항-수용-승화의 단계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모습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둠의 순간, 낙심의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지는 말아야 합니다. 믿음과 기도로 저항할 것은 저항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승화시켜서 이겨야 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힘과 이끄심이 어둠의 때를 지날 때마다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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