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보살핌과 아낌의 마음 배우기(요5:1~9). 양은익 목사. 2016.5.22

 

 2016년 5월 22일 주일예배
보살핌과 아낌의 마음 배우기(요5:1~9)

보살피고 아끼는 마음 다시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이 보살피고 아끼는 마음이 들어오면 우리 삶이 더 복될 것입니다. 사진 한 장 보겠습니다. Nan Goldin 이라는 유명 사진 작가의 작품입니다. 심하게 맞은 사진입니다. 사진 속 여성은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맞은 후 한 달 지난 후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Nan Goldin 자신입니다. 사진 밑에 이런 문구가 씌여 있습니다. “이 사진은 나 자신이며, 나의 친구들이며, 나의 가족이다” 자기만 그렇치 않다는 것 입니다. 친구, 가족, 누구나 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폭행 당할 수 있습니다. 이 폭행에는 육체적인 폭행뿐 아니라 정신적, 심적 폭행 모두 해당 됩니다. 각성시키는 의도로 전시했다고 합니다. 외국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삽니다. 만남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신중을 기하고, 또 천생 연분이라 하면서 가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만남만큼 중요한 것이 좋은 연을 잘 유지하는 것입니다. 천생 연분을 만나면 뭐합니까? 보살피고 아끼지 못하면 얼마든지 사진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육체적 멍을 들게 할 뿐아니라 가슴에, 심장에 멍들게 할 수 있습니다. 만남과 관계를 잘 유지시키는 것은 그냥은 안됩니다. 보살피고 아껴줘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보살핌과 아낌을 더주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생각을 더더욱 가져야합니다. 보살피는 마음, 아끼는 마음 이 이야기를 도덕적으로 흘려 들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삶의 밑바탕입니다. 마음 밑바탕에 보살핌과 아낌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보살핌은 정성을 기울여 돕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아낀다는 것은 상대방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맘에 있으면 삶이 흐뭇해지고 격려가 됩니다. 이 두 마음이 있으면 삶의 분리가 아니고 결속이 일어납니다. 지금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있으면 서로 불편하고 신경쓰여 따로 생활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핌의 영, 아낌의 영이 함께 하시면 결속이 일어납니다.

가정에 보살핌과 아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보살핌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보살핌의 정성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아낌에서 가정의 치유와 기적이 일어납니다. 보살핌과 아낌에서 하나님의 기적과 치유가 선물로 옵니다. 그래서 보살핌과 아낌은 하나님 가정에 꼭 살아있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이 좋은 마음들이 우리 안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보살핌과 아낌이 잘 안되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1.”내 코가 석자”라는 생각이 항상 내 맘에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어 내 맘에 남을 돌아 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강박 관념에 우리는 사로 잡혀 있습니다. 남을 돌보고 보살피는 것은 생산성도 없고, 잘못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돌보는 것을 거의 포기하는 수준입니다.

주님이 드신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다 그냥 내버려 두고 지나쳐 갑니다. 그러나 원수처럼 대하던 사마리아인이 본인이 바쁜데도 본인의 일 다 제쳐두고 자신의 돈을 써가며 보살펴 줍니다. 이 비유를 드시면서 주님은 “정말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물으십니다. 이 시대 내 코가 석자라는 마음이 없어져야 보살피는 마음이 확산 될 것입니다.

2.우리의 결정적 약점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 아픔을 태생적으로 잘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을 느끼는 것은 예민한 감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못 느끼는 것이 우리의 약점입니다. 너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이 타인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속에 살아갑니다.

본문의 베데스다 못 사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38년된 병자를 주님이 고치자 유대인들은 계속 시비를 겁니다. 왜 입니까? 38년된 병자가 치유를 받은 것은 분명 축복해주고 기뻐해줘야 할 일 아닙니까?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종교성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고 안식일에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났기 때문에 시비를 건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성을 가지면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38년은 정말 거의 평생이라 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정말 고생하다가 주님과 만나 일어나 걷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을 축복 못하고 그 사람의 아픔의 치유를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끝끝내 38년된 병자에게 촛점을 맞추십니다.

베데스다 못은 치유 받기 위해 병든 환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하는 곳입니다. 선착순의 논리가 지배하는 지역입니다. 전설적으로 병자, 맹인, 다리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등 병자들이 물이 끓어 오를 때 일착으로 물에 들어가면 치유된다는 미신이 있었습니다. 물이 동하면 그 못은 살벌한 곳으로 변합니다. 내가 낫기 위해 옆 사람은 원수로, 경쟁자로 변합니다.

38년 된 환자는 움직일 수 없어 물이 동해도 못들어 갑니다. 경쟁에 낙오된 사람입니다. 베데스다 못의 뜻은 “긍휼의 집”입니다. 겉으론 병자를 치유하는 아름다운 곳인데 치유가 일어나는 순간은 피 튀기는 경쟁의 장소입니다. 차별과 선착순의 경쟁이 일어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치유되려면 일등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 은혜 받기 위해 내가 앞서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양보도 안되고 남을 보살펴도 지는 겁니다. 오직 내 은혜, 내 치유만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큰 교회 새벽 예배 앞 좌석은 새벽 2시면 다 찬다고 합니다. 치유 집회나 송구영신 예배 등은 더 경쟁적으로 앞 좌석 다툼이 일어납니다. 평상시에는 뒤에 있던 사람들이 말이지요. 이런 모습은 베데스다 못과 같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치유가 일어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논리는 끔찍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나만 은혜받고 잘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영적인 이기심이 우리 안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경쟁이 들어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들어 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38년 된 환자에게 다가 가셔서 잘 보살펴 주십니다. 19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그대로 한 것뿐이라 하십니다. 이 마음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에게 희미해져가는 보살핌, 아낌의 마음이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중하게 배워나가야 합니다. 회복해야 합니다. 아이의 그림이 대단치 않아도 부모 눈에는 정말 훌륭해 보입니다. 그래서 액자에 보관하고 두고 두고 대견해합니다. 우리가 아낌과 보살핌의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그림을 액자에 보관해서 대견해 하는 그 부모의 심정으로 우리를 흐뭇해하시고 기뻐하시며 큰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1.물에 일착으로 들어가야 치유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명령이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경쟁에서 이겨야만 신앙 생활도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같이 싸우지 않아도 충분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등 안해도 나을 수 있고 넉넉한 마음으로 잘 살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주님은 경쟁하는 삶의 방식에서 과감히 벗어나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평생 그곳에서 상처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은 아예 그 자리에서 떠나라고 하십니다. 물이 동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베데스다를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못하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믿음 성품 다 버립니다. 떠나라는 주의 말씀 잘 순종해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떠나서, 거친 마음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경쟁 사회 속에서 서로 따뜻이 보살피고 아끼는 마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마음 잃으면 안됩니다. 이 마음으로 이웃과 옆 사람들 아끼고 잘 보살피는 마음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 가질 때 하나님 치유하심과 기적이 일어납니다. 떠날 장소가 어딘지 잘 보십시오. 떠날 때 하나님의 치유와 기적을 경험 할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 아낌과 보살핌의 이 귀한 마음 회복되게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복된 마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시오. 베데스다 못 같은 곳에 사는 저희들. 떠나는 결단 일어나도록 축복해 주십시오. 아멘.(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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