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10. 산상설교12:허영과 맞서라(마6:1). 양은익 목사.

 

2016년4월10일 주일예배
말씀:산상설교12: 허영과 맞서라(마6:1)

겉과 속의 문제입니다. 6장 1절부터 18절까지 3가지 예(구제, 기도, 금식)를 들면서 말씀하십니다. 요지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필요 이상 과장하거나 드러내거나 겉치레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과장하다 보면 진실에서 벗어날 수 있고 거짓과 위선에 빠질 수 있기에 주님은 “주의하라” 하십니다.

“구제”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웃과의 관계가 핵심입니다.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제는 은밀하게 떠벌리지 말고 하라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광장에서 보이기 위한 쇼를 하지 말고 골방에서 은밀히 하라고 하십니다. 금식도 티 내지 말고 단정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모르게 해도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늘의 상이 있다 하십니다.

주님은 숨은 동기를 굉장히 중요시하십니다. 드러내지 않고 진실하고 정성껏 할 때 우리는 “허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허영”이란 실제보다 부풀리고 과장 과시해서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허영은 결국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과시, 뻥튀기된 삶을 살고 있으며 허영의 유혹은 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향연”은 왜 우리가 허영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얼마나 명예를 추구하는지 보라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불멸의 영광을 영원히 쌓고 싶어 하고 명예를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든 용맹하게 감수하려 하고 이를 위해 돈을 쓸 준비가 되어있고 모든 종류의 시련을 겪으려 하고 영광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죽으려고까지 한다 “

외식(위선~가면 쓰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허영을 중심이 된 악으로 다뤘습니다. 허영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은 자랑하고 싶어 허영에 빠지고, 없는 사람은 없는 것을 숨기고 가리기 위해 허영에 빠집니다. 있는 것을 더 드러내기 위한 자랑은 교만함에서 오는 허영이며, 없는것을 있는 척 위선하는 것은 두려움을 숨기기 위한 허영입니다. 두려움에서 오는 허영이 더 강력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 착한 행실을 드러내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나를 본받으라 하셨으니 드러내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즉 동기가 교만에 있거나, 두려움에 있으면 그것은 허영입니다. 과시하고 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질병입니다. 치료받아야 할 병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신앙생활이 보여주는 것에 초점이 있게되면 영적인 자유함이나 넉넉함, 여유로움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8~10: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허영의 문제를 어떻게 다뤘을까요. 수도사들의 지침은 새겨 둘만합니다.

1.사람들의 의견과 말에 집착하지 말라
4세기에 수도사에게 허영의 문제를 상담하러 오자 수도사는 공동묘지에 가서 하루는 실컷 욕하라 하고 다음날은 엄청난 칭찬을 하라 시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욕할 때 누가 뭐라 했는가? 칭찬할 때 누가 뭐라 했는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상담인의 답에 수도사는 구원받고 싶으면 죽은 사람처럼 되라고 알려줬습니다. 즉 초연해 지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발끈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면 허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초연할 수 있는 것도 굉장히 큰 축복입니다.

2. 시기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안에 잠복해 있는 시기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인은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합니다. 남이 잘되면 속상한 것이 시기심입니다. 죄악된 감정입니다. 고약한 마음입니다. 본인에게도 힘든 마음입니다. 시기심을 벗어나지 못하면 허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좋은 은사와 장점과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넓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넓어지려면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감사함이 있어야 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영광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늘 나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나그네 인생길을 한 공동체 안에서 사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시기 같은 감정을 없앨 수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장발장) 일부입니다. 장발장이 교도소에서 출소하여 갈 곳 없을 때 주교가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주교가 그의 옆에 앉아 있다가 그의 손을 다정하게 건드렸다.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필요없어요. 여기는 내 집이 아니얘요. 여긴 예수그리스도의 집이얘요. 저문을 들어오는 사람에게 이름이 뭔지 묻지않고 다만 고통이 뭐냐고 물어요. 당신은 고통속에 있고 배고프고 목말라요. 그러니 당신을 환영해요. 그러니 나에게 감사하지 말고 내가 당신을 나의 집에 받아줬다고 말하지 말아요. 이집은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곳이얘요. 지나가는 사람인 당신이 나보다 더 이집에 있어 마땅한 사람이얘요. 여기있는 모든 것 당신이 사용하도록 하려는 거얘요. 왜 내가 당신 이름을 알아야 하겠어요? 게다가 당신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아는 당신의 한가지 이름이 있어요. 그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내 이름을 안다고요? 예. 주교가 말했다. 당신은 나의 형제얘요

교회와 성도들의 마음이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은 나의 형제예요. 당신을 환영합니다. 이런 마음의 눈이 열리면 과시하고 자랑하고 속이고 위선 하는 허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평판과 판단과 영광에만 매달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눈을 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눈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27:1)(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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