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6. 주일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채우소서(요14:27). 김명숙 전도사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으로 채우소서(요 14:27)

오늘 본문은 샬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평안의 복음을 전해주시는 말씀입니다. ‘평안’, ‘평강’, ‘평화’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사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사이에서 서로 전쟁과 다툼과 갈등과 고통이 없는 평온한 상태가 떠오르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평화를 원하지만 세상은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사회는 분열과 다툼이 멈추지 않고 사람과 사람도 갈등과 상처로 얼룩지는 일이 반복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갈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출구를 찾습니다. 술로, 스포츠 활동으로, 쇼핑, 여행 등등으로 고통을 잊으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아 문제로부터 멀리 도피하기도 합니다. 현실을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고 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아예 현실과 분리하는 명상에 빠지기도 합니다. 깊은 동굴에서 끊임없는 자기암시로, 혹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기대어 평온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찾지 못합니다. 이것은 결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평화는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율법적으로 선한 행위로 평안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나쁜 일,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찾아 열심히 봉사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악한 마음과 생활을 멀리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 죄로부터 자유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속죄로부터 자유와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에서 ‘나의 평안’의 의미를 함께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본문의 헬라어 ‘평안(Εἰρήνην: 에이레넨)’은 구약에서 히브리어인 ‘샬롬(םלוֹשָׁ)’의 헬라어 표현입니다. 샬롬은 유대인 사회의 일반적인 인사로 구약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말입니다. 나라의 평화, 사회와 개인의 평화를 뜻하면서 완전함을 향한 소망, 갈라지고 부서진 곳에 회복을 향한 소망, 영혼의 충만과 만족과 축복을 소망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평안을 말씀하실 때의 본문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는 유월절 전날, 목요일 즉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십자가의 죽음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식사하시고 제자들 발을 씻기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팔 제자가 있고 또 세 번 부인할 베드로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거처를 예비하시고 다시 오시며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맞이할 고난과 두려움으로 흩어질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들과 제자들을 통해 주를 믿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예수님은 남겨질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흩어지고, 자신은 인류의 죄를 그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 죽음의 처절한 고통을 감내하셔야 함을 아셨습니다. 남겨질 제자들도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으로 배척과 핍박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등과 고통과 죽음의 위험을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없는 것입니다. 이 거센 폭풍과도 같은 위기를 앞두고 주님은 평안을 말씀하십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사람의 죄를 대속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엡 2:13~17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고통 속으로 들어가십니다.(이사야 53:5).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마 26:46). 십자가에서 울부짖으십니다(마 27:46). 그러나 주님은 이 처절한 눈물 속에서도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피하고 싶으신 십자가의 고통이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기도를 하십니다(막 14:36).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 영광을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드립니다(요 17:1).

이 고통을 이기시고 주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화평의 관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이 고통을 온 몸으로 이겨내시고 주신 엄청난 구원과 화해의 선물이요, 영원한 은혜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입니다. 세상의 누구도 이루어낼 수 없는 평화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고 그 뜻을 완성시키시는 예수님만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주를 바라보는 자에게 고난 중에서도 담대함과 평안을 채워 주십니다. 처음엔 두려움에 흩어졌던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남겨진 복음의 일꾼으로 교회를 세워 갑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의 일꾼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신약의 서신서의 대부분은 고난 중에 있는 초대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구하는 인사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평안보다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안고 삽니다. 어떻게 하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 그의 약속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깊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시 119:165a).”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의뢰해야 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이사야 26:3).”

주께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와 간구는 기도한 대로 상황이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변화된 마음으로 혹은 새로운 힘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주님 앞에 나아가 짐을 내려놓고 나아갈 때, 평안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주님을 기다리는 남겨진 제자들, 복음의 일꾼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골 1:24).

여러분과 저에게 정직하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세상이 주는 안정감에서 평화를 누리지는 않습니까? 혹은 세상이 주는 갈등을 회피해서 평화를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깨어진 부분은 어디입니까? 깨어지고 갈라지고 무너진 관계가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고침을 받고 회복되는 일들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시대 남겨진 제자들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제자로 우리도 이 땅에서 신앙 여정 중에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고난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평화로 넉넉히 이겨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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