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21. 주일 설교. 마가복음 강해 31: 사랑이 달린다.(막6:53~56). 양은익 목사

 

 

마가복음 31: 사랑이 달린다(막6:53~56). 

1. 

정호승 시인의 시 한 구절 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정호승,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슬픔이 있지만, 슬픔을 아는 이들이 함께해서 슬픔 많은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것, 품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이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슬픔과 눈물과 안타까움으로 간절한 사람들이 보이십니까? 한 두명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아픈데, 이 아픈이들과 함께하는 이들또한 많이 있습니다. ‘함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픈 이들, 슬픔 당한 이들을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 달리는게 힘든데도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들 고쳐 주고 싶은 일념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어디로 달립니까? 치유자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립니다. 치유자가 산에 있으면 산으로 가고, 들에 있으면 들로가고. 아픈 이들 들쳐 메고, 침상째 들고 달리고 있습니다. 달리는 이들이 누군인지는 안 나오지만 누가 됐든 고쳐 주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겁니다. 이 장면은 사람이 달리는 게 아니라, 사랑이 달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달리는 사람들의 속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사랑’과 ‘치유에 대한 간절함’이 있기에 달리고 있습니다.

2.
53절에 사건의 발단이 나옵니다.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절.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절.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원래 가려던 곳은 벳새다(45절)였지만, 내린 곳은 게네사렛입니다. 밤새 고생한 바람 덕분에 예상치 못한 곳에 우연히 내리게 된 곳입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마치 오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 처럼, 예수님 일행을 알아 보고 달려 오고 있습니다. 카톡도 없는 시대지만 예수님 일행의 상황을 기가 막히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왔다. 지금 광화문에 있다. 내일은 강남역이다’ 그러면서 아픈 이들 들쳐 업고 달리고 있습니다.

56절입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했다’ 갈만한데 예상했다가 미리 가서 앉아 있는 겁니다. 짠하지 않으세요. 지금까지는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잡을 수 있는 한가닥 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소문 듣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병든 사람 침상째로 매고 나온 것은 침상째로 데려간 중풍병자가 낫다(막2:1~12)는 소문 때문인 것 같고, 예수님 옷 가에 손을 대려고 한 것은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 옷 만져서 낫다(막5:25~34)는 얘기듣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낫다면 우리도 낫지 않겠는가! 이 마음 하나 갖고 달려온 것입니다.

3.
치유에 대한 희망 품고 달려온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 같은데, 예수님 소문 듣고 다시 희망이 솟아난 겁니다. 치유는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거, 아시지요. 희망이 있어야 치유가 시작되지, 희망이 없으면 치유도 없게 됩니다. 희망은 치유의 중요한 조건입니다. 치유를 원하면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사람 마음은 약해서 아프게 되면 희망이 사라지고, 꺽이게 됩니다. 희망대신 원망이 올라 옵니다. 왜 아파야 되는지, 왜 고통을 당해야 되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불안합니다. 치유를 막는 주범들인데, 이럴수록 희망이 필요하고,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희망을 말했지만 희망을 말할 때 희망을 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을 절망으로 듣고, 자신이 경험한 안 좋은 일로 연결해서 냉소로 들을 때가 많습니다. ‘희망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어’하면서 희망 고문 하지 말라고 항변합니다.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 땅에서의 치유는 사실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치유일뿐입니다. 몸의 치유는 언젠가는 끝나게 되 있습니다. 가장 완전한 치유와 안식은 죽음이고, 부활의 몸입니다. 그럼에도 부분적인 몸의 치유를 보면서 치유를 절대시하면서 치유를 우상화하게 되면 치유에 끌려 다니게 되고, 하나님마저 놓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잠정적인 치유를 약속하는 작은 희망이 아닙니다. 더 크고, 영원한 희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뢰에서 오는 희망,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희망이고, 가져야 할 희망입니다. 생로병사,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서 오는 희망, 이런 희망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병도, 건강도, 죽음도 부활도, 실패도 성공도 하나님의 이끄심 가운데 있습니다. 절망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희망이 있는 한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설수 있고, 서야 합니다.

희망이 있으면 보입니다. 하나님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계시고, 내 곁에서 항상 함께 걸어 주시고, 눈물 흘릴 때 마다 눈물 닦아 주시고, 이런 모든 장면이 보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고전 10:13절 말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희망 꼭 가지십시오. 가지셔서 어떤 시험에도 무너지지 말고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희망을 갖고 달리는 사람과 희망 없이 앉아 있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프고, 힘들 때 누군가는 희망을 가지고 끈질기게 달려야 합니다. 산이 나오면 넘고, 물이 나오면 건너가고. 그래서 치유자 앞에 서야 됩니다. 그때 새로운 하나님의 치유가 시작되는 겁니다. 낙심천만해서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떤 기회도 생기지 않습니다. 아픔이 있을 때 마다 이 치유의 조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치유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와 믿음, 소망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의 희망을 품고 사는지 한번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희망이 크면 좋겠습니다.

4.
오늘 본문은 몸의 치유를 말하고 있지만, 몸의 치유만큼 중요하고, 더 앞서야 하는 치유가 영의 치유, 영혼의 치유입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건강할 때 건강한 겁니다. 치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치유하면 안되고, 영혼도 건강하지 못하면 고쳐야 됩니다. 몸이 아프면 긴장하는데, 마음, 정신, 영이 병든 것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의 병 이상으로 긴장하고, 고쳐야 하는 게 영적인 병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뭡니까? 몇가지 적어 왔는데 한번 체크해 보십시오. 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지 않을 때 ② 주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 갈. 때 ③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걸맞는 생의 목적을 발견할 때 ④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분별할 때 ⑤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⑥ 다른 사람들과 은혜로운 관계를 맺을 때 ⑦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의 충만 할 때 등등.. (하워드 밴더웰. 살며 사랑하며,IVP, p.25~26)

이런 모습 대신에 자만과 분노와 질투와 시기와 분쟁, 나태함 같은 영적 죄들에 쉽게 노출되 있으면 영혼은 병들어 있는 겁니다. 심각한 병입니다. 영혼의 병 고치지 못하면 많은 것이 무너집니다. 영혼이 무너지면 몸도 무너집니다. 몸의 병과 영혼의 병은 깊게 연결되 있습니다. 함께 고쳐야 합니다.

56절에 오늘 말씀의 결론이 나옵니다. ‘예수께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댄 사람들은 성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치유가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인입니다. 우리의 치유도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터치 하셔야 하고, ‘달리다굼’(막5:41),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는 예수님의 소리를 끊임없이 들어야 됩니다.

서로의 치유를 위해서 도와 주시고, 포기하지 말고 희망 품고, 사랑으로 달리십시오. 치유의 영광과 기쁨을 주께서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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