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31. 주일 설교: 있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막11:11~18). 양은익 목사. 송년주일


말씀:있어야 할 것, 버려야 할 것(막11:11~18)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11:11-18)

사진 한 장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버스정류장 광고란에 붙은 포스터 사진에 ‘엄마가 보고 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2013년 사진입니다. 이 포스터 사진은 한 음료 회사가(홍초) 광고하기 위해 제품 출시 전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해 사용한 광고입니다. 상당한 광고 효과를 보았던 광고입니다. 저는 이 포스터를 보면서 ‘엄마’를 ‘하나님’으로 바꾸며 순간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다’. ’하나님이 아신다’

엄마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도 올렸습니다. ‘God sees. God hears. God knows’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의 제1 명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앞에 계시고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의식입니다.

‘하나님은 아신다!’ 이 명제를 우리의 마음에 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설마. 인구가 이렇게 많은데.’ 하시며 의심하십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이시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성경의 진수-하나님은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CCTV가 있기 훨씬 전부터 ‘Eye of the sky(하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2, 새번역)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이 시인의 고백이 마음속 깊이 사무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영으로 다가오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카프카(1883-1924)는 ‘선은 악을 모르고, 악은 선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하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안다.’ 시인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139:10, 새번역) 내가 스올과 낭떠러지, 나의 가장 비참한 곳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거기서도 나를 붙잡아 주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시며 사랑스런 시선이 늘 우리에게 머문다는 이 사실에 큰 위로와 위안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 하고 있을 때뿐 아니라, 잘못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의 시선은 내게 향해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을 때는 때론 이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겠지만 긴장하시고 감사하시며 너무 불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 년을 마감하는 이 시간에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이 말씀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 함은 주님도 아신다 함이요, 성령께서도 다 아신다 함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막11:11)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 사람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며 찬양하고 난 다음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후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는 것은 샅샅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베다니에서 일박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성전을 자세히 살펴보셨으며, 보셨기에 모든 것을 눈과 마음에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게 되셨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보신 것과 봐서 알게 된 지식으로 다음날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오늘 두 장면이 나옵니다. 이 두 장면은 송년 주일 살펴야 할 중요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개인적으로 이 메시지를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1. 무화과나무 심판 사건(막11:12~14): 있어야 할 것이 없음에 대한 심판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11:12-14)

주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풍성하고 여유 있게 식사한 적은 드무십니다. 이날도 그러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발견하셨습니다. 잎이 풍성하여 열매가 풍성할 것 같이 생겼습니다. 시원한 무화과 열매로 시장기를 달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한 후 열매가 맺힌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가서 보시니, 겉으론 풍성해 보이던 무화과나무에는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Nothing’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과격한 선언을 하십니다.’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는 선언을 하십니다.

왜 그런 선언을 하셨습니까? 주님은 겉만 번드르르한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겉만 그럴듯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셨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보시면서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가슴 아파하시며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렘8:13)라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선언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에 대한 주님의 심판 선언입니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2. 성전 정화사건(막11:15~18): 없어야 할 것이 있음에 대한 심판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막11:15-18)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후 성전을 살피셨습니다. 성전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다 살펴보셨습니다. 다음날 성전에서 하실 일을 다 마음속에 정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지내신 후 제자들과 다시 성전에 오셨습니다. 성전에는 제자들을 동반하지 않으신 채 홀로 들어가십니다. 원문에는 단수와 복수 구별이 되기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계획되고 의도된 소란을 피우십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거룩하고 존귀한 곳인데 강도의 소굴이 됐다는 것입니다. 더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성전이라면 성전에 있어야 할 마땅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마땅한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있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거래되는 모든 것에서 나오는 이윤을 성전 권력자들이 착취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은 더는 제사장이 아니라 강도며, 강도보다 더한 자들이기에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화를 내시며 성전뜰 물건들을 들어 엎으십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는 물건들이 들어감을 보시고 막는 소동을 피우신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타락한 성직자들, 빛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빛과 열매가 없음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음을 보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 모두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없음에 대해, 없어야 할 것이 있음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생깁니까? 영적 시각에서 신앙인들의 삶의 문제는 여기에서 생깁니다. 없어야 할 것이 내 안에 자꾸 생겨나고, 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 내 안에 없는 것에서 문제는 생겨납니다.

우리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라고 했습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오늘 주시는 말씀과 책망은 우리 자신입니다.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영적인 무화과나무는 우리입니다. 성전 정화사건에서 주님께서 책망하신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성전은 우리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깨끗한 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면 버리십시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내버려 두면 결국은 썩게 됩니다.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또한,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만드는 노력과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없앨 것을 없애고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만들려면 정말 잘 살피고 반성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1년을 마감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세심히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있어야 할 것이 내 안에 얼마나 있는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없어야 할 것이 내게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을 분별해 내는 영적인 안목과 눈이 우리에게 가득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버려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얘기해 줍니다.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육체의 행위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 이런 것들이 버려지지 않고 우리 안에 쌓이면 우리는 영적으로 아주 어려워지기에 버리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바울은 얘기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우리는 이것을 늘 기억하고 가지려고 늘 노력해야 합니다. 삶은 우리를 얼마나 방해합니까? 인생은 또 얼마나 방해를 합니까?

바울은 있어야 할 것을 반드시 가지라고 합니다. 있어야 할 것-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하나하나는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분쟁과 시기는 우리를 망가뜨리는 놀라운 세력입니다. 이 망가뜨리는 악의 세력은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사랑과 화평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어떻게 하면 버릴 것을 버리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들수 있습니까?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고 알려줍니다. 성령은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반면 악령은 없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듭니다. 성령안에 있으면 우리는 넉넉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령안에 있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우리를 넉넉하게 해 주십니다. 그 넉넉케 해 주심으로 원수도 죄인도 친구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불꽃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그 길 밖에는 아무 길이 없습니다.

살다보면 내 안에 없어야 할 것들이 쌓여갑니다. 없어야 할 것을 정화하는 과정을 해나가지 않으면 삶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지금 이 어려움 중에 있습니까? 바울의 이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고 받으십시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을 따르십시오. 그렇게 성령을 따르면 있어야 할 것이 있게 됩니다.

모세의 이 절실한 기도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진리입니다. 이 기도가 송년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90:10,12)

인간의 시간은 유한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의 경계선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신자의 하루하루의 삶은 절대로 잊히거나 소멸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견고히 보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막살아서도 안되며, 허송세월해서도 안됩니다. 유한한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기도드린 모세의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롭게 신속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려내며 지혜롭게 시간을 사용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없애야 할 것들을 버리며,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풍성하게 있기를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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