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영접, 환영, 품어줌(막9:33~37)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9:33-37)
지금까지 대림절 세 개의 촛불, 희망과 평화와 기쁨의 촛불을 차례대로 켜왔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네 번째 사랑의 흰 촛불을 켰습니다. ‘사랑!’ 이 얼마나 벅찬 단어입니까! 우리가 켰던 이 촛불이 의미하는 4가지 단어,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이 우리 각 개인과 가정과 자녀들에게 담기기를 소망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다’(이해인, 기다리는 행복 중에서)라고 했는데, 힘든 시간 보내며 밀물과 어둠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교우들 계신다면 캄캄한 밤 목자들에게 나타났던 성탄의 영광의 빛이 더 환하게 비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인사는 내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영접. 환영. 품어줌’입니다.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한 사람을 영접함은 밀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영접함은 주변 사람을 환영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 4번째 말씀은 소박한 말씀입니다. 기본적인 말씀입니다. 이 ‘영접’이란 단어를 성탄의 소중한 단어로 받아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대비가 되는 두 장면이 나옵니다. 한 장면은 제자들이 보여주는 다툼의 장면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두 번째 장면은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아주시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33절) 표현은 점잖게 토론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격하게 다투고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충돌하며 말싸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싸웠습니까? 제자들이 싸운 이유가 34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34절)
지금 주님께서는 공생애 거의 마지막에 이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단계임을 예고하시고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제자들은 함께 가는 중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마지막 길을 함께 가면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이유는 ‘누가 크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흔한 일이기에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많이 봅니다. 회사들도 연말에는 자리다툼이 늘 있기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제자들 역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구세주, 메시아, 왕으로 오신 것으로 알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자 이제 거의 끝이 다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의 자리에 앉으시면 나는 이 자리, 저 자리를 서로 앉겠다고 다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가다 싸우는 것을 다 듣고도 잠잠하시다가 집에 도착하여 쉬실 때 물으시는 것입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다투었느냐? 제자들은 답을 하지 못합니다. 34절. ‘그들이 잠잠하니’ 잘 한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도 그 시대의 피해자입니다. 로마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 서열 사회입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입신양명, 출세 못 하면 서럽습니다.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직업은 2/3가 어부였습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들로써 왕 되신 예수님 덕분에 신분 상승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한국 사회만큼 뿌리 깊은 서열문화가 만들어 낸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있을 정도입니다. 철저한 서열의 사회, 서열이 능력인 사회가 한국입니다. 유대 사회와 마찬가지입니다. 위 서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아파합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이런 정신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서열과 우열과 지위의 높고 낮음이라는 체계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35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앉으신 다음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새번역). 첫째, 꼴찌, 섬김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단어가 좋으십니까? 모두 ‘첫째’라는 단어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 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10장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10:43-44, 새번역) 여기서도 위대, 섬기는 사람, 으뜸, 종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극심한 경쟁 사회 속에서 이렇게 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주 강력하게 선포하십니다. 격렬한 선포입니다. 우리는 지금 ‘지배와 서열’의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선포는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배의 포기’를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백성의 삶이라고 하십니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자녀도 첫째 되고, 으뜸 되는 것이 좋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러 왔다!’(막10:45) 주님의 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겸손’함에 머무를 때입니다. 겸비한 모습으로 섬기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답고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한 가치를 위해 주님의 초대를 받은 자들입니다. 군림하는 자리가 아닌 낮고 낮은 섬김의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이 낮은 자리에서 섬김으로 이웃을 돌봄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는 모습으로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세로 주님을 따를 때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가치들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기사에 외고생이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사건이 올라왔습니다. 유서에는 ‘이제 됐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엄마가 그토록 원하던 성적에 도달하자, 이 문자를 엄마에게 남기고 투신한 것입니다. 엄마의 첫째를, 으뜸을 만들고자 했던 욕망이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경쟁력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병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세상과 똑같은 박자를 맞추며 사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엇박자를 내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세상과 교회는 똑같은 박자를 냅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를 심어 주고 계십니까? 주님의 명령대로 받은 가치를 아이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과 다른 박자로 살 수 있는 영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어린아이를 따뜻하게 품어 주심으로 주님과 아이들이 같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귀여움의 존재로서의 어린아이가 아니고, 약하고 무력한 존재로서의 상징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기를 바랐지만, 주님은 어린아이를 안으시면서 ‘나는 권력자가 아니다. 연약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찔립니다. 주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37절) ‘영접’이라는 단어의 확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 즉 연약한 자를 받아줌은 나를 받아주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을 받아 주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실제의 삶에서는 작은 자를 영접하지 않음은 예수님도, 하나님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접’이라는 이 귀한 단어를 오늘 주님이 주시는 선물로 꼭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는 대림 주일 마지막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아주신 어린아이는 무력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연결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위대하신 왕께서 가장 무력하고 약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기쁜 성탄 누구를 영접하고 품어 주시겠습니까?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품어 주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새롭게 품어줄 사람을 찾아 품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강한 자가 있을까요? 그들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실상은 강한 자 일수록 약하디약한 자입니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싸우며 상처 입고 경쟁하며 지쳐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꼭 안아주시면서 우리에게도 이 어린아이와 같이 약한 이들을 품어 주라고 하신 말씀 소중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무력하고 약한 자들을 품어줌은 주님을 하나님을 영접함이라 하신 말씀 잘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 가치가 싫어서 세상 가치와는 다른 ‘영생’을 소망하며, 주님을 찾아 교회로 부름을 받아 온 사람들 아닙니까? 아직도 세상 가치에 머물러 있다면, 반드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 (약자)를 영접함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황량한 비인간화의 시대에 하나님을 만나고,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일러주신 주님의 분부대로 품어주시고, 영접하고, 환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탄의 놀라운 빛과 영광이 환하게 비칠 것입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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