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17. 주일 설교: 아무도 없어도(욥19:23~27). 양은익 목사.

 

말씀: 아무도 없어도(욥19:23~27)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19:23-27)

성탄절이 가까워짐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촛불( 기쁨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촛불이 의미하는 기쁨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하고 축원 드립니다.

오늘은 말씀 보기 전에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시인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함께 보겠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어릴 적 읽을 때 보다 지금 다시 보니 훨씬 깊은 공감이 느껴집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려고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전 우주가 총동원되어 애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생명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전 우주의 애씀으로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욥을 보면서 고난 중에 핀 ‘한 송이 국화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도 삶의 고난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욥이란 인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 인물 중 누구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욥을 좋아하는 성도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욥이 당한 처절한 고난 때문에 혹시나 나에게도 그런 고난이 닥칠까 봐 욥은 오히려 기피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욥은 그러나 대단한 인물이며 본받아야 할 인물입니다. 욥은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한 많은 소쩍새가 슬피 울듯 그렇게 많이 울었습니다. 이유 모를 고난 속에서 친구들이 위로라고 해주는 그 소리에 찔리며 더욱 많이 아파하며 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이 어렵고 고난 중에 아파할 때 정말 잘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욥이라면, 욥의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욥은 결국 다시 하나님을 찾고 믿음을 되찾게 됩니다. 욥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면 나도 욥처럼 할 수 있을까? 오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방의 재벌이었습니다. 가진 게 없었다면 좀 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감당해야 했을 고난의 강도를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어떻게 그 큰 부를 이루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한 것을 보면, 부정직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았던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욥은 천상에서의 계획을 전혀 모르는 채 순식간에 폭삭 망하는 아픔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도 정말 천상에서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욥의 몰락을 정리하면, 그 많던 재산이 순식간에 차례대로 마치 주식이 휴짓조각이 되듯이 사라졌습니다. 종들도 다 뺏기고 죽임당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열 남매가 집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다 깔려 죽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욥 자신도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만신창이가 됩니다. 그 상태에서 친구와 대화하며 기도함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욥은 종기로 인해 가려움이 견딜 수 없어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어댑니다. 긁은 부위에서는 피고름이 나고 잿더미에 앉아 긁어대는 모습이니 꼴이 정말 말이 아닙니다. 재벌이던 그가 이런 신세가 됐습니다. 아내마저 싸늘하게 등을 돌립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속상하니까 그랬겠지…. 하면서도 그래도 할 말, 못할 말이 있는데, 끔찍한 고난 앞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위로한다고 찾아온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7일간은 아무 말 없이 욥을 위로했고, 욥도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후 친구들은 ‘네 죄를 네가 알지 않냐? 죄를 지어서 이런 것이니 하나님께 죄를 고하고 회개하라’라고 합니다. 이런 친구들의 찌르는 아픈 말들이 3장부터 끝까지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 정말 대단합니다. 네가 죄를 지어 이런 징벌을 받는 것이니, 더 시간 끌지 말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충고는 전형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판단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친구들의 사고방식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일 하면 벌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우리 대부분의 사고방식입니다. 이 사고방식에 길들여 있기에 우리는 나쁜 일, 형편없는 일을 하고 잘사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욥이 주는 도전은 이 사고 체계에 대한 도전입니다. 세상에 ‘뿌린 대로 거둔다’는 법칙만 통용되면, 세상은 과연 정의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요?

여러분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뿌린 대로 정확히 거두시는 분이시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좀 너그러이 봐주시는 분이면 좋겠습니까?’ 성경에 신명기에는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는다’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불순종하는 것을 정말 조금이라도 너그러이 봐 주시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정말 좀 너그러이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원칙대로 하자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얘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친구들은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들이댑니다. 과연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원칙만 붙들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을 가지고 계십니다. 질서를 가지고 이 땅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신명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복을 못 받으면 기분 나빠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불순종하면 벌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벌 받으면 기분 나빠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 받는다 것은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발전하는 계시의 원칙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을 보십시오. 인간은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발끈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타락한 본성을 가진 존재인 인간을 질서를 갖고 다스리며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원칙 이상의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이 곧 대로의 원칙만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칙을 뼈대로 하시고, 거기에 살을 붙여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살이 무엇입니까? 그 살은 바로 사랑, 용서, 관용, 이해입니다. 누구에게 이 살들을 붙여 나가기 시작하십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벌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이 살을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칙대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관용으로 품어 주시는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시103:8-10) 기계적 인과응보의 처벌로 사람들을 죽여 나가지 않도록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합니까?

사람들은 옳은 것이 종교라 합니다. 성경은 옳음을 넘어 ‘용서’하는 것이 종교라 합니다. 용서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공의’는 정말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옳다는 이 정의와 공의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한 정의와 공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의와 공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넘어 용서로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사람도 사회도 조직도 정의와 공의만으로는 살려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이 세상이 원칙과 공의와 정의만으로 잘 돌아간다면 오실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원칙과 정의와 공의만으로 안되기에 오셨습니다.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사람들이 사랑합니까? 선을 행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말씀대로 선을 행합니까?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겉으로는 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모두가 사랑과 용서와 관용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해석만으로 인생을 해석하지 마십시오.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도 판단하지 마십시오.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너무 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과거가 비록 부끄러운 과거 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이미 다 받아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용서하심을 위해, 그 크신 사랑으로!

시편 103편의 다윗의 고백은 너무나 좋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뿌린 대로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간음의 큰 죄악을 저지른 자신을 죽음의 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사랑과 관용으로 용서하시는 너무나도 감사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부른 노래입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4-5)

지금 내가 욥처럼 잘못한 것이 없는 데 고난을 겪으며 고통 중에 계십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큰 뜻을 헤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욥처럼 다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을 사용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원칙을 앞세우며 따지며 사십니까? 우선은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좋습니다. 정의, 공의를 따지며 너무 조급하게 사시지 마십시오. 사랑과 용서와 관용이 훨씬 좋습니다. 이런 사고가 없으면 우리는 욥의 친구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는 욥 친구의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친구들의 계속되는 지적에 욥은 참담하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욥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떠납니다. 형제들, 아는 사람들, 친척과 친구들, 손님들, 여종들, 욥의 숨 쉬는 소리조차 싫어하는 아내 아이들조차 욥을 업신여깁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원수가 됩니다.(욥19:13~19) 다 떠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문상도 가지 않는 것이 사람들 인심입니다. 욥은 주변에 아무도 없자 부르짖습니다. ‘아,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기억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하는 말을 비망록에 기록하여 주었으면! 누가 있어 내가 한 말이 영원히 남도록 바위에 글을 새겨 주었으면!’(욥19:23-24, 새번역)

홀로 남은 것입니다. 잿더미 속에서 울부짖는 비참한 모습의 홀로 남은 인간의 처참한 모습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정말로 기적과 같은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이런 반전이 일어났고, 욥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들어 구원자를 기대하는 욥의 대림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19:25-27)

절대 절망의 상황, 삶의 폐허 한복판에서 욥은 이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대속자와 구원자가 살아 계시며 자신이 당하는 이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어도 구원자는 반드시 오시며, 자신이 앉아있는 이 처참한 자리에서 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살아서 못 보면, 죽어서라도(육체 밖에서) 반드시 보리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욥은 대속자만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학자들은 이 부분을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대림절’로 봅니다.

삶의 가장 아프고 비극적인 순간, 폐허 속에서 대림절이 온 것입니다. 이 기다림의 선포는 의미심장합니다. 은혜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격적인 도우심으로 우리 교우들도 모두 욥처럼 일어서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또 앞으로 어떻게 사실 것입니까? 이 놀라운 은혜의 순간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소망하고 희망을 품으라고 욥은 도전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을 기대하며 사십시오. 최고의 은혜는 최고의 고통 속에 옵니다. 지금 최고의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욥도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끄심을 입었습니다. 끝끝내 육체 밖에서라도 하나님을 보겠다는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국화 한 송이가 피어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입니다. 두고두고 새기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땅에 내리기까지 오래 참으며,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으십시오.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보십시오. 참고 견딘 사람은 복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욥이 어떻게 참고 견디었는지를 들었고, 또 주님께서 나중에 그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가여워하시는 마음이 넘치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크십니다.(약5:7-11, 새번역).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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