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집중 기도회 13: 대단히 위험한 시험(창22:1~12). 양은익 목사. 2017.11.1

 

말씀: 대단히 위험한 시험(창22:1~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12)

오늘은 11월을 여는 첫날입니다. 11월 한 달간도 주님과 늘 동행하며 힘차게 사시며 새 힘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창세기 22장 사건입니다. 내일까지 22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지금 아브라함 인생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삶을 모든 이들이 넘어야 할 중요한 산이 나오는데 잘 보고 다 함께 넘으면 좋겠습니다.

1절에 ’그 일 후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소돔 성도 멸망했고, 아브라함은 100에 아들을 얻어 할아버지 같은 아빠가 됐습니다. 늦둥이 아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아들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도 모두 떠났습니다. 집안의 갈등 요소는 다 사라졌습니다. 아브라함도 노년의 평안한 삶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 터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충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말씀은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 전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의 강도로 청천벽력처럼 임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잘 못 들었나?’ 할 정도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한참 성장 중인 이삭을 인신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이 말씀을 받은 후에 아브라함의 반응에 대해서 무서울 정도로 침묵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가?’ 아브라함은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2절과 3절 사이, 명령받고 순종하여 길 떠나는 시간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공포와 전율’로 가득한 아브라함 인생 최고의 고통스러운 시간, 희망과 인내가 심하게 흔들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침 일찍 길 떠나기까지 아브라함은 칠흑 같은 어두운 밤 한가운데서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으로 고통하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아들의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면 아들이 죽습니다. 불순종하면 아들은 삽니다. 도망치면 살고, 모리아로 가면 죽습니다. 그 밤에 얼마나 많은 질문을 아브라함이 했겠습니까?

약속의 아들을 받으면 불행 끝, 행복 시작.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다 뭐고, 할례는 뭐하러 받게 했으며, 까놓고 말하면 아들을 달라 해서 준 것도 아니고, 가만있는 사람 불러서 그 고생하면서 준건데, 이제 와서 다른 이도 아니고 아비 손으로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고, 예, 정말 감당하기도 힘들고,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뼈아픈 고통, 대단히 위험한 시험, 아슬아슬한 시험을 겪고 있습니다. 순종해도 문제, 불순종해도 문제입니다.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요?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22장 사건입니다. 성경은 1절에서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절). ‘시험’이 그 이유입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꿈에도 이 이유를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유는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 될 자격이 있는지? 하늘의 별과 같은 뭇 백성들의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 마지막 고난도의 테스트를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토록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위태로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지는 하나님께서도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증거는 12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순간 모질게 칼을 빼든 것입니다.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입니다. 이제 급해 지신 쪽은 하나님입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한 엘리 위젤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순간 가장 놀란 이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이삭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이제야’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사람 앞에서 겁먹었던 아브라함, 믿음이 적어 흔들렸던 아브라함과 아들을 향해 칼을 빼 들고 마지막 명령까지도 순종하려 하는 아브라함 사이의 차이에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희망을 뺏고, 인내를 뺏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뺏는 이 엄청난 시련 앞에서 아브라함은 정면으로 돌파하며 승부를 걸 정도로 믿음이 성장한 것입니다.

집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3일이 걸립니다. 이 시간은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7절에서 이삭은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냐?’고 가슴 미어지는 질문을 합니다. 이때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감정으로 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감정으로 접근했다면 모리아 산에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만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납득 할 수 없는 일을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지만 ‘그럼에도’ 믿었던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걸 걸고 있습니다. 욥의 고백 처럼(욥1:21)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가져가실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마음과 믿음으로 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여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전부가 아닌, 하나님께 모든 걸 걸고 살지 않는 ‘믿는 자’들을 위해서 보여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끄럽지만 믿는 우리에게서조차 ‘하나님’이 전부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변두리로 밀려나 계실 때가 많습니다. 나에게 절대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주는 하나님 말고, 뺏어가는 하나님도 믿을 수 있는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말고, 약속을 깨고, 취소하는 하나님도 믿을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도 믿을 수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정도까지 와 있을까요? 깊고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서 나가십시오.(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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