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5.28. 주일 설교: 간절한 자기 투쟁(막10:46~52). 양은익 목사


말씀: 간절한 자기 투쟁(막10:46~52)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10:46-52)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분 김창완 씨가 인터뷰 중 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당신에게 연기와 음악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이 참 인상적입니다. ‘제게 연기는 좋아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음악은 제가 원해서 하는 겁니다. 좋아서 하는 연기는 만약 돈을 받을 수 없다면 안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음악은 제가 원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못 벌더라도 제 돈을 들여서라도 할 겁니다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좋아서 하는 것보다 원해서 하는 것이 훨씬 강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은 이 둘 중 어느 것입니까? 신앙생활을 좋아서 하게 되면, 내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하게 될 것입니다. 기분이 좋고 원하는 것을 얻게 될 때는 굉장히 잘하게 되지만, 얻는 것이 없을 때는 그렇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원함이 있어야 헌신도 가능합니다. 원함이 있어야 간절함도 생깁니다. 원함이 있어야 이득에 개의치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 원함이 간절한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간절하게 원하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원함은 취미 생활 정도의 원함이 아니고 자기 삶 전체를 걸고 있는 간절한 원함입니다. 그 원함이 너무나도 강렬하여 ‘간절한 자기 투쟁’이라는 설교 제목을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바디매오의 눈을 치유해 주시는 주체가 예수님이지만 구원받고자 하는 바디매오의 간절한 원함, 간절한 싸움이 중심에 있습니다. ‘원함’과 ‘간절한 원함’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눈을 뜨게 되기까지의 각 장면을 여러분께서 감정이입을 하여 바디매오의 간절함을 실제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의 삶의 여정 중 중요한 단어가 ‘간절함’입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46절 아버지가 디매오로 나옵니다. 디매오의 뜻은 더럽고 역겹다는 뜻입니다. 그런 뜻의 이름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본명은 아닐 것입니다. 그 시대만 해도 소경은 저주받았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바디매오는 선천적인 소경은 아닌 것 같습니다. 51절 후반 바디매오는 ‘보기를’ 정말 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다는 블레포입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에는 ‘아나블레포’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나’는 ‘다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 새번역에는 ‘다시보기’를 간절히 원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선천적 소경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무슨 이유인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소경이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다시 보는 것은 강렬한 바람이며 소망이며 절박함이었을 것입니다. 간절함이란 이런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단어입니다.

간절함이란 뭔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간절함은 뭔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있게 되면 그 간절함이 수단이 되어 뭔가 변화가 일어납니다. 기도와 간절한 기도는 다릅니다. 사랑과 간절한 사랑은 다릅니다. 믿음과 간절한 믿음은 다릅니다. 간절함에는 무언가 변화시키는 힘, 움직임이 있습니다. 간절함은 하나님을 설득하고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약5:17) 엘리야 선지자의 간절함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핵심도 ‘간절함’입니다. ‘간절함’ 이라는 단어는 신앙인에게 삶이 무미건조한 상황이 오거나, 어려움이 닥칠 때 겸손한 신앙의 행위이자 겸손한 언어입니다.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생기가 돕니다. 그래서 자신도 살아나고 옆 사람들도 살립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셔야 합니다. 간절하다고 해서 모두 응답받고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간절함’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모습이 간절하기를 바라시고 원하십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수용하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지금 당장 내게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극복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는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간절함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간절함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계십니까?

말콤 머거리지(영국의 언론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다. 거기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많은 것을 얻어 내시기 바랍니다. 46절에서 사건은 예수님과 일행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면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고난이 기다리는 공생애 마지막 장소입니다. 지금 공생애의 거의 끝 무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지역을 오신다는 소식을 거지 소경 바디매오가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바디매오는 마음이 끓어 오르는 격동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와 용서와 사랑에 대한 많은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던 그입니다. 자신의 눈이 어쩌면 볼 수 있게 될 마지막 기회라고 여깁니다.

본문을 보면 이런 바디매오의 간절함을 담은 행동들이 쓰여 있습니다. 47절 ‘듣고’. 이 듣다는 hear 정도의 의미가 아니고 learn의 의미 즉 간절한 들음의 의미입니다. ‘소리 질러’. 옆 사람이 놀랄 정도로 고함친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절규합니다. 48절 ‘더욱 크게 소리 질러’. 51절 ‘원하나이다’. 이 원함은 desire, 욕망입니다. 만남을 간절히 바라기에 이것은 욕망의 수준입니다. ‘어쩌면 눈 뜰 수 있다는’ 간절한 마음. 이 마음은 대단히 훌륭한 마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오늘의 나의 믿음의 마음과 바디매오의 간절한 마음을 비교해 보십시오.

결핍이 있어야 간절함이 생깁니다. 건강을 잃어야 우리는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바디매오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47,48절) 외칩니다. 이런 외침은 간절함이 있어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죽을때까지 이 고백을 한번도 못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외칩니다. 이 모습은 실로 정직한 모습입니다.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는 고백이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이 외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 총리 후보에 오른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기자출신이며 인품이 좋은 분입니다. 예전에 이분이 신앙 고백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외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의 큰 수술이 있었습니다. 교회 목사님과 성도 십여명이 수술실 앞에 모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아버지는 기도할 줄을 몰라 멀뚱하니 구석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당시를 회고하며 쓴 글입니다. ‘저는 그때 참담했습니다. 기도를 모르는 제가 비참했습니다. 아비 이전에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절대자께 간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수술은 아들과 저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교회 문을 두드렸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 직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합니다. IMF때 수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이 새벽예배에 나와 울부짖는 처절한 기도들을 드리는 것을 봤습니다. 이제는 그때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한 기도였는지를 압니다. 아마 그분들은 그때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울며 간절히 기도했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은 광야와 같은 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불신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간을 이겨 내는 방법은 사람들의 충고만으로는 역부족입니다. 약간의 도움은 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해 줄 힘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근원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사 죽음까지도 극복하신 우리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고 그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4-35, 38-39)

바로 이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삶의 상황들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핍의 순간마다 바디매오처럼 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결핍은 간절함을 만듭니다. 간절함은 반대에 부딪히지만 이겨낼 때 믿음을 선물로 받습니다. 바디매오도 그랬습니다. 47~48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소리치며 예수님을 만나러 나오는 바디매오를 사람들은 눌러 버립니다. 거지 주제에 방해한다고 하찮게 보고 무시하며 눌러 버립니다. 나의 간절함을 세상은 알아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반대에 눌려 버렸다면 바디매오는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크게 소리 지릅니다. 간절함이 있을 때 더 많은 반대가 있을 것을 아셔야 합니다. 결핍은 그러기에 더 처절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2개의 발가락과 몸통만을 갖고 태어난 닉 부이치치는 얘기합니다. ‘제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백번이라도 다시 시도할 것입니다. 제가 포기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강인하게 이겨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자살도 시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극복했습니다. 두 개의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능수능란하게 합니다. 수영도 하고 서핑도 합니다. 아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간절한 자기 투쟁이 있을 때 믿음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난관을 뚫고 바디매오와 예수님이 만나는 감격스러운 장면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50,51) 바디매오는 예수님 만나 어디서도 할 수 없었던 말, 그의 삶을 아프게 만들었던 그 일을 청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뭉클한 장면입니다.

이 청원에 주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10:52). 주님의 선언이 놀랍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라 하십니다. 구원과 치유는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어짐이 있으려면 간절한 믿음의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기 위한 간절한 자기 투쟁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눈을 반드시 뜨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믿음의 눈이 띄어 질 때 여러분은 살아날 것이며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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