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1. 주일설교.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2: 마음 넓힘의 삶(고후6:11-13).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2: 마음넓힘의 삶(고후6:11-13)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6:11-13)

성탄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3주차입니다. 오늘 켜는 촛불은 기쁨의 촛불입니다. 기쁨의 촛불을 높이 드셔서 여러분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온 세상을 빛으로 환하게 비추는 아름답고 기쁜 성탄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는 정화의 삶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는 바람(소망)을 가지고 마음 넓어지는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에게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마음을 넓히십시오’. 직설적인 표현을 한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바울을 반대하는 무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헛소문이라도 계속 들으면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냥 있으면 안 되겠기에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희에게 마음을 열고 넓히며 사랑을 했다. 그러니 마음을 넓혀 우리와 화목하자’. 믿음으로 지내자고 권고하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 권고는 그 당시 상황을 떠나서도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설득 당해야 합니다.

마음은 늘 열려있어야 합니다. 마음 문이 닫혀 있으면 나와 너 사이는 멀어지고 낯설어집니다. 마음 문을 열면 나와 너는 밝아지고 친해집니다. 내 마음이 좁아지면 내게서 나온 가시는 주위 사람들을 찌르게 됩니다. 찔린 상처는 깊이 남아 그 삶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도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8.13)고 권고합니다.  마음을 닫지 말고 부드럽게 하고 스스로 조절, 통제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마음 넓힘은 한순간 다짐으로 안되기에 어렵습니다. 우리는 비록 어렵고 힘들더라도 마음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하나님 말씀을 허투루 듣지 말고 우리 안에 늘 말씀이 살아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넓어지려면 그냥 저절로는 안됩니다. 우리는 먼저 각자의 마음을 촉진해야 합니다. 촉진이란 의사가 섬세한 감각으로 환자를 만져보며 진단을 내릴 때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질 때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촉진해봐야 합니다. 왜 이렇게 여유가 없어졌을까? 왜 내가 이렇게 변해갈까? 하는 마음의 촉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 넓힘의 가장 첫 번째 단계입니다. 촉진했으면 문제점을 잘 다뤄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리고 약하기 때문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남녀노소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로 약합니까? 우리는 상대방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에도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마음이 연약합니다.

어떤 분이 인사하면서 ‘오늘은 얼굴이 밝으시네요’했습니다. 인사받은 상대방은 정색하면서 ‘지금까지는 제 얼굴이 어두웠나 보네요’ 했습니다. 이런 반응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반응에 놀란 후에는 조심스러워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숭실대 조성기 교수입니다. 조교수는 신학 공부를 했고, 교회에서 목회도 하고 글(소설가)도 쓰는 분입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았다고 하자 친구가 조언했습니다. ‘오늘도 얼굴이 밝으시네요’하면 된다고 알려줬습니다. ‘오늘은’, ‘오늘도’ 이렇게 작은 차이가 우리 마음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은 약합니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린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삽니다. 마음이 넓어지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어설프게 마음 넓어진 흉내만 내면 더 큰 피해를 입을수 있습니다.

마음 넓힘은 개인의 마음만 넓힘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마음은 두 가지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마음과 사회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사회가 주는 집단적 마음이 내 안을 뚫고 들어와 내 마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주는 마음은 거의 부정적인 영향을 내게 줍니다. 내가 통제하고 걸러내지 않으면 물밀 듯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 와, 나는 그 마음에 길들게 됩니다. 이 두 마음을 분리해서 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사회가 주는 마음은 선하거나 아름답거나 넉넉하게 하거나 복되게 하는 마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생각없이 생존을 위한 삶만을 산다면 내 마음 속에는 사회가 주는 부정적인 영향의 마음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냥 생각 없이 큰 의식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마음을 넓히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분노하는 사회에서는 내 마음에 분노가 밀려들어 오고, 이념싸움에 매몰된 사회에서는 극한의 이념싸움에 휘말린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회학자들은 이 사회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내 안에 거르는 여과장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과장치가 작동 안 하면, 성공을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는 오로지 성공만을 향해 달리게 되고, 노후 걱정으로 조급하게 되고, 독선에 빠져들게 되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화가 나고 울화통이 치밀게 됩니다. 이 모두가 사회가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잘 따름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넓은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기준이 있기에 계속 밀려들어 오는 이 부정적인 집단의 마음을 통제해 나갈 수 있습니다.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 600만 명을 가스실에서 살해한 주동적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1906~1975)은 1960년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무척이나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에 나온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했고 게다가 가정적이기까지 했음을 알고 놀랍니다. 유대인 학살이 정신병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에 경악한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재판을 지켜보며 리포트를 씁니다. 그 글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과 판단 기준을 잃고 지내다 보면 사회가 주는 마음으로 악을 행하는 주범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우리 모두 안에는 아이히만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추한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할 때 인간은 인간이기를 그치게 된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 되려면 세상의 부정적인 정서와 부정적인 마음에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예리하게 판단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넉넉한 마음을 지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좁아진다는 것은 나와 너 사이에 불화, 불통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좁아지는 것은 많은 부분이 사회가 주는 강퍅함으로 마음이 좁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성찰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 자신 마음을 촉진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새번역) 그냥 마음 넓히기 어려우면 복음을 전하며 사랑으로 함께한 그 시간을 기억하며, 보답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넓혀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보답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넓히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밑바탕에는 모두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이 기억은 절대로 희미해져서는 안 됩니다. 생생하게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주님께 깊이 뿌리내리고 주님께 깊이 다가갈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넓어지게 됩니다. 딱딱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넓어집니다. 믿음은 우리의 마음을 넓히는데 큰 수단이 됩니다. 세상이 주는 다급함에 끌려들어 갈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여유와 당당함을 갖게 해줍니다.

‘7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8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렘17:7-8, 새번역) 믿음은 마음 넓힘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주는 삶의 풍성함을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마음이 가진 파괴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큰 힘으로 작용합니다. 이 믿음은 사회가 주는 부정적 마음을 거부하고 저항하게 해줍니다.

함석헌 선생은’ 웃으면서 싸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싸울 일이 생길 수 있지만, 그 싸움을 싸울때, 인상쓰고 죽기 살기 식으로 싸우지 말고 넉넉하고 통 큰 마음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불행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통 큰 정신을 가진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세 번의 배신에도 주님은 용서하고 전심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에도 주님은 진심으로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 하시고, 오리를 가자고 부탁하면 십 리를 함께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이토록 넓으셨습니다. 이 주님의 마음은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마음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의 마음을 자꾸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자꾸 흡수하고 품고 따라야 합니다. 마음이 넓다는 것은 사랑이 있다는 것, 용서가 있다는 것, 관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관용보다 더 진보적인 힘은 없습니다. 세상의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것으로 곧 소멸하여 사라집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장 강력한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 무한하신 관용, 우리가 따라야 할 최종 목표입니다. 이런 궁극적인 해답을 가진 우리가 사회 이데올로기를 따른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교회는 살려내야 합니다.

260년경 로마 전역에 역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로마인들은 역병의 퍼짐을 막기 위해 격리하고 감염된 사람들이 죽기도 전에 내다 버리며 사투를 벌였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인에게 감염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감염된 사람들을 돌보느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로마인들은 어마어마한 숫자가 죽었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환자 돌보기에 목숨을 내던진 그리스도인들은 오히려 대부분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이긴 비결을 이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디오니시우스의 편지에 쓰여 있습니다(기독교의 발흥, 로드니 스타크 p129~130)

‘우리 기독교인 형제들은 대부분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주었으며 한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옮자 그 아픔을 자신에게로 끌어와 기꺼이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를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교도는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이교도들은 질병이 처음 발생하자 아픈 자들을 내쫓았고 가장 가까운 자부터 도망쳤으며 병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로 내다버리고 매장하지 않은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과 전염을 피하고자 했으나 이내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치기 어려움을 깨달았습니다’

가야 할 길은 멀지만, 마음을 넓히는 일을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돌 같은 마음이 아닌 부드럽고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의 계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배우셔서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이웃과 우리 사회가 주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정리: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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