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4. 주일 설교.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1: 정화의 삶(마13:1~9). 양은익 목사.


말씀: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1. 정화의 삶(마13:1~9)

12월 첫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부터 대림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에서는 성전 앞쪽에 촛대를 4개를 준비하고 4주에 걸쳐 1개씩 촛대를 켭니다. 첫 주는 사랑의 촛대를 둘째 주는 희망의 촛대를 셋째 주는 기쁨의 촛대를 넷째 주는 평화의 촛대를 켭니다. 오늘은 둘째 주일입니다. 오늘 켜는 촛대는 희망의 촛대입니다. 사랑, 희망, 기쁨, 평화 이 네 가지가 이 땅에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주시지만 우리 자신도 만들어가야 합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마음 중 오늘은 ‘정화의 삶’을 살피고 다음 주는 ‘마음을 넓히는 삶’, 그리고 그 다음 주는 ‘회개하는 삶’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기쁜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는 좋은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정화의 삶은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정화란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중요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물과 사람 모두 처음에 깨끗해도 시간이 지나면, 더러워지고 얼룩이 생깁니다. 막히고 불순물이 생깁니다. 닦아주고 뚫어 주어야 길이 보입니다. 그냥 놔두면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배설도 육체의 큰 정화작용을 합니다. 육체가 만약 배설기능이 고장 나면 중대한 질병이 올 것입니다. 육체도 그렇지만 마음, 정신, 영혼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정화하고, 배설시켜야 합니다.

정화 중 정화는 마음의 정화입니다. 육체도 중요하지만, 마음이 또한 중요합니다. 상처, 억울함, 분함, 섭섭함, 속상함이 꽉꽉 들어차 있음을 봅니다. 조금씩이라도 깨끗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지금은 나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정화과정이 없으면 서서히 병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연말과 성탄의 계절, 정화하며 순수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정화되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으면 주위가 다 편안해집니다.

정화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예전부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정화’의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과거의 상처들을 마음속에 남기지 않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그렇게 해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화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정화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부당한 일을 당하면 각자 반응하는 방식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복수, 삭이기, 용서입니다.

첫째, 복수하는 삶
내가 당한 만큼 갚아 주고 복수하고자 하는 방식의 삶입니다. 당사자에게 직접 갚지 못하면, 강아지에게라도 화풀이하는 것입니다. 복수는 할 당시에는 속이 좀 시원한 것 같고 후련한 것 같아도 끝이 안 좋습니다. 결국은 후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당한 일을 당해도 복수라는 단어를 아예 생각조차 못 하도록 삭제시켜 버려야 합니다.

둘째, 삭이고 참는 삶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에 계속 꾹꾹 누르고 참는 방법입니다. 끝까지 지혜롭게 참으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에 문제가 됩니다. 모든 그릇에는 용량이 있습니다. 용량이 넘치면 뻥 터지게 됩니다. 단순 복수보다 더 큰 사건이 터질 수 있습니다.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참기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닙니다. 삭이고 참는 삶도 지우시기 바랍니다.

셋째, 용서하는 삶
우리는 자꾸 용서가 어렵다고 하고,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용서하게 될 때 가장 큰 수혜를 얻는 것은 용서하는 자신입니다. 전전긍긍하던 마음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고 상대방이 우습게 보이는 수준까지도 이를 수 있습니다. 이 삶은 차원이 높은 삶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삶 쪽으로 가야 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넘어서는 삶,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힘이 내 안에 생기려면, 내가 정화의 삶을 살아야 가능합니다.

용서하려면, 과거 상처와 아픔의 회복과 그 부정적인 것들의 배설이 필요합니다. 배설은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해줍니다. 이 경험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배설의 시원함을 경험할 때 나를 묶던 악몽들은 다 비워지고 청소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진정한 용서의 능력이 솟아나게 됩니다. 정화의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죄성을 가진 우리는 스스로는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며, 하나님만을 갈망할 때, 하나님의 신비한 힘이 내 안에 임재하시며, 나를 정화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감동적인 글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향기를 아낌없이 발하시니 내 숨은 멎었고 이제 당신을 갈망합니다. 당신을 맛보니 내가 주리고 목이 탑니다. 당신이 나를 토닥이시니 내가 당신의 평화를 애타게 구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삶에서 꼭 경험해봐야 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께서 나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계셔서, 내게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너무나도 약하고 희미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이 타들어 갈 정도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어거스틴을 보십시오. 그토록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은 과거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목이 타들어 가도록 갈망하는 삶은 나를 온전히 정화할 것 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섭섭함, 속상함, 상처등에 묶여 말로만 용서를 이야기할 뿐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는 것만이 나를 정화해, 그 감격과 감사함으로 나를 넉넉히 용서할 수 있는 자로 변화시켜 줄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이 있으십니까? 그것들을 하나하나 치워 나가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종류의 밭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밭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입니다. 왜 차이가 납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밭을 살펴보면 밭과 씨앗 사이에 모두 장애물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새와 태양과 가시입니다. 18절 이하에 주님의 해설이 나와 있습니다. 새는 악한 자를 의미합니다. 악한 자가 결실을 다 낚아채 갑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악한 자가 있습니까? 이 장애물을 해결하셔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태양은 환란과 박해(삶의 어려움)를 의미합니다. 이 태양은 나를 묶어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가시는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입니다. 이 가시도 제거해야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치우고 정화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둘 중의 하나다. 영감을 따르든지, 기억을 따르든지. 삶의 모든 문제와 인간의 모든 불행은 기억을 따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아주 귀한 말입니다. 여기서 영감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삶,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와 나를 토닥여 주는 삶입니다. 반면 기억을 따르는 삶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과거 기억은 썩 좋은 것이 없습니다. 좋은 기억이 있더라도 우리는 나쁜 기억만을 오래 간직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불행한 과거의 기억을 따름으로 인함입니다. 나쁜 기억들은 무의식의 창고에 조용히 쌓여 있다가 조건과 상황이 맞으면 서서히 표면 위로 떠오릅니다. 섭섭함, 상처들, 억울함입니다. 그들이 표면으로 떠오르면 우리의 아픈 과거가 살아납니다. 그래서 우리를 짓누르고 우리의 삶을 불행으로 끌고 갑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정화되지 않은 채 쌓인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이것을 정화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정화하고 떠오르는 것을 차단하지 못하면, 우리는 상처와 피해의식에 짓눌린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정화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피로 정화해야 합니다.

신경숙 작가의 1993년 초기 소설 작품 중 ‘벌판 위의 빈집’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단편소설입니다. 평론가는 이 소설이 섬뜩하게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고, 무서운 이야기라고 논평했습니다. 짧게 소개합니다.

한 가난한 부부가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삽니다. 그러던 중 벌판 위에 있는 빈집을 발견합니다. 며칠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어 부부는 그 집에 정착합니다. 아이도 하나 낳습니다. 겉으로 보면 정말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아이가 5살 되던 해에 하루는 엄마와 아이가(딸) 장에 갔다가 왔습니다. 집 현관은 가파른 계단 아홉 개를 올라야 합니다. 아이가 계단 한 개를 오르며 묻습니다. ‘엄마 나 이뻐?’, ‘응 그럼’. 또 한 계단 오르고 똑같이 묻습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쉼 없이 또 묻습니다. 마지막 9번째 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나 이뻐?’ 엄마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힘에 사로잡혀 아이를 떠밀어 버립니다. 아이가 계단에 밀려 떨어집니다. 떨어져 창백해진 얼굴로 또 묻습니다. ‘엄마 나 이뻐?’ 그리고 숨을 거둡니다.

세월이 또 흐릅니다. 아픔도 서서히 잊혀가고 부부는 또 딸아이를 낳게 됩니다. 둘째가 5살 되는 해에 두 모녀가 장에 갔다 옵니다. 딸아이가 계단을 오르며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엄마 나 이뻐?’ 그날은 첫째가 죽은 날입니다. 엄마는 과거의 기억으로 긴장합니다. 아홉째 계단을 오르면서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계속하던 딸아이가 드디어 아홉 번째 계단에 도달했습니다. 엄마도 마지막 순간까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합니다. 그리고 질문에 답합니다. ‘응 그럼~’ 그러자 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습니다. ‘그런데 왜 그때 날 밀었어? 엄마?’….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집은 다시 빈집이 됩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왜 아이는 계속 ‘엄마 나 이뻐?’ 반복해서 물어야만 했을까요? 왜 엄마는 아이를 밀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엄마와 아이의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관계는 아빠와 아이로 바꿀 수도 있고, 부부 사이 관계로 바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입니다. ‘엄마 나 이뻐?’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기묘한 불통과 이해 불능의 아픔을 얘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친밀해야 할 관계가 서로 이해 못 하는 불능의 관계로, 서로 불통한 관계로 추락하여 파괴되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삶, 과거의 기억 속에 외면적으로만 관계가 유지되는 삶입니다. ‘나 이뻐? 근데 왜 밀었어?’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마의 죄이며, 나도 엄마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의 문제입니다. 가족 간의 사랑의 문제입니다. 가족 간에는 사랑의 표현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엄마 나 이뻐? 여보 나 멋있어?’ 얼마나 유아적인 칭얼거림입니까? 하지만 이런 유아적인 칭얼거림이 받아들여질 때, 가정은 사랑과 행복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묻고 확인해야 한다면, 분명 그 가정에는 소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삶의 정화에는 소통이 중요합니다. 불통은 비극의 시작입니다. 빈집은 가정의 해체와 파멸을 상징합니다.

기억이 무서운 것은 정화되지 않은 채 상처 속에 남겨지면, 우리를 불행으로 밀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국을 맞을 수 있습니다. 텅 빈 집에 살지 않으려면 하나님 은혜로 정화된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쁜 상처, 아픔 모두 하나님 은혜로 정화하십시오. 사랑 가득한 마음을 정화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로 정화해 기쁜 성탄과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정리: 김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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